<Before> 시리즈 중 첫 번째 영화인 <비포 선라이즈>를 본 것은 90년대 후반, 대학 근처의 비디오 방이었다. 공강시간이었는지 아니면 수업을 제끼고 간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무척 안락한 의자가 있던 비디오방에서 영화를 보았던 것 같다.


영화는 유럽의 어느 기차에서 만난 이성에게서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 남녀가, 비엔나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이야기였다. 첫눈에 반해버린 제시(에단 호크Ethan Hwake)와 셀린(줄리 델피Julie Delpy)의 장애물은 시간이었다. 이 남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룻밤. 그래서 그토록 애틋한 것인지 그들이 하룻밤을 보내면서 하는 것은 오직 '수다'뿐이었다. 그들의 대화 소재는, 사랑, 섹스, 꿈, 운명 그런 것들이었다. 무슨 말들을 그토록 끊임없이 쏟아내는지, 사랑이라는 것이 이토록 많은 말들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난 돌아버리겠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안락한 의자에서 잠이 들었다.


당시의 나는, 수다란 여성들의 전유물이거나 술이 취했을 때나 하는 헛소리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2000년도 중반쯤 <Before>시리즈의 두 번째 편인 <비포 선셋>을 극장에서 보았던 것 같다.


 이 영화는 전편에서 애틋하게 헤어졌던 두 남녀가 파리에서 재회하는 이야기였다. 제시는 셀린과 함께 했던 비엔나에서의 하룻밤을 소설로 써서 유명한 작가가 되었고, 소설 홍보 차 파리를 방문한다. 셀린은 출판된 제시의 책을 읽고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자신임을 알게 되고, 파리를 방문한 제시를 찾아간다. 그렇게 둘은 만난다.


그렇게 만난 둘이 무엇을 하냐면 또 '수다'를 떤다. 카페에서, 센 강의 유람선에서, 차 안에서, 수다는 끊어지지 않는다. 정말 끊임없는 폭풍 수다!!! 수다의 소재는 일, 사랑, 섹스 등이다. 서로에게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상대에 대해서 그토록 끊임없이 말하는 두 사람의 장애물은 또다시 시간이다. 제시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해가 지기 전에 그는 공항으로 떠나야 한다. 


<비포 선셋>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마지막 셀린의 장면이다. 공항으로 떠나야 하는 제시는 소파에 몸을 묻고 셀린을 바라본다. 셀린이 기타를 치면서 자작곡 A Waltz for a Night을 부른다. 그리고 니나 시몬Nina Simone의 흉내를 내면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데, 이 방안의 풍경은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는,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장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영화는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음 한편으로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고자하는 인물들을 냉소했다. 




그리고 어제(7월 24일) <비포 미드나잇>을 보았다. 광화문 시네큐브 2관에서. (영화는 공항에 있는 에단 호크로 시작하는데, 그의 배가 조금 나와있었다. 얼굴의 주름도 조금 늘기는 했지만, 세월이 흘렀음에도 덜 늙은 것 같아 아쉬웠다. 한편 줄리 델피, 그녀의 눈가에는 짙어진 다크 서클과 주름이 가득했고, 뱃살도 늘었다. 이런! 그녀는 여전히 젊기를 바랬는데... ㅎㅎ)


남녀는 부부가 되어있었고, 둘 사이에는 쌍둥이 딸이 있었다. 가족은 그리스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다. 일주일의 여름 휴가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하룻밤이 지나면 그들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시와 셀린의 수다가 또다시 시작된다. 그런데 전편들에 비해 수다의 소재가 늘어났다. 아이들, 직장인으로서의 경력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전작들에서는 주로 둘만 이야기했다면, 이번 편에서는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함께 휴가를 보내는 일행들이다. 일행 중 한 부부가 제시와 셀린을 위해 호텔을 예약해 주었고, 둘은 호텔까지 걸어가며 둘만의 수다 시간을 가지게 된다.


둘은 전편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지나온 인생과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던 둘은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서 석양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밤이 되자 둘의 대화는 싸움으로 번진다. 싸움이 격해지자 셀린은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선언하고는 호텔방을 나가버린다. 둘 사이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1994년에 유럽의 어느 기차에서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했던 연인이 이제 위기의 부부가 되어버린 것! 이제 둘은 자정이 오기 전에... (부부싸움을 끝내게 될까?)


<비포 미드나잇>을 보는 내내 흐뭇했다.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그리고 둘이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었다. 사실 그들의 대화에는 일관성도 없고, 특별한 주제도 없고, 툭하면 자기 자랑에다, 억지에다, 과도한 신경질에, 통속적인 관념들에, 유치한 유머들로 버무러진 것들이기는 한데... 왜 이렇게 재밌는 거지? 영화 속의 그와 그녀는 20년 전처럼 수다를 떨고 있고, 난 <비포 선라이즈>를 보며 수다가 지루해 잠이 들었었는데, 지난 20년의 시간 동안 내가 어떻게 되어버린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저들처럼 수다스럽게 사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명상과 같은 침묵 속에서 사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다는 것이 함정 아닌 함정.) 상대의 말을 듣고, 나 역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러다 다투고, 다투다가 사랑하고, 상대를 미소짓게 하기 위해 좀 망가지고... 설득시키려고도 해보고, 그러다가 안되면 어쩔 수 없고, 상대방에게 설득당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하고... 그러다 서로의 등을 토닥여주고.... 그러다 키스하고.... (그러다 자정이 오기 전에...) 이렇게 사는 것도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지난 시간동안 겪게된 변화라면 변화겠지. 이제 나라는 사람은 더 이상 수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거나 수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잠을 도피처로 삼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더 이상 수다가 여성들의 전유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다는 모두가 공유해야하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수다스러운 삶의 묘미를 깨닫고 느끼는데 길고도 긴 시간과 많은 사건들이 필요했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이 내용과 논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니, 한편으로는 허탈한 웃음이 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비포>시리즈를 누구와 함께 보았는지 기억을 되돌려 보았다. <비포 선라이즈>는 학과 친구들 여럿이서 함께 본 것 같은데,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비포 선셋>은 어떤 이성과 함께 보았는데... 그녀는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그리고 <비포 미드나잇>은 ... 혼자 보았다. 


이제 수다의 묘미를 깨닫고, 기꺼이 수다를 향해 온 몸을 던질 준비가 되었음에도 <비포 미드나잇>을 혼자 보게 되는 것(세월이 흐를 수록 영화를 함께 볼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혼자보는 영화가 많아지는 것), 이것이 영화와는 다른 현실의 함정이라면 함정이다. ㅠ.ㅠ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 디비디에서 캡처.

 레코드 샵, 음악감상실 속의 셀린과 제시. 좁은 공간의 둘은 좀처럼 눈을 맞추지 못한다.



<비포 선셋>의 한 장면. 디비디에서 캡처.

◆ 자신의 자작곡을 노래하는 셀린


◆ <비포 미드나잇> 한 줄 요약: 자정이 오기 전에 침실로 Go!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