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의 나는 영화라는 저잣거리에서 지쳐있었다. 길을 잃었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때로는 멍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영화를 멀리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많은 영화들 때문이었다. 세상의 모든 영화를 다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영화들을 보고 있었다. 막다른 길에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갈림길을 앞에 두고 주저앉아 버린 느낌이었다. 그런 내 자신의 모습과 울음을 터트린 아이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는데, 눈 앞에 놓여있는 사탕, 초콜릿, 카라멜 등에 마음을 빼앗긴 아이가 자신의 조그마한 손이 원망스러워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나는 울음을 터트렸지만 달래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게 다가온 이들은 위로의 말을 건네기는 커녕 더 많은 눈요깃거리를 들이대며,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져보라고 했다. 나의 시선을 빼앗은 이들이나 내 삶의 시간 일부를 가져간 이들이나 그들은 자신들이 챙길 것만을 챙기고 사라졌다. 그들이 챙긴 것은 그들 몫의 돈이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끌 삶의 시간 일부를 차지하는 것, 이것이 돈이 되는 세계니까. 

 

내 앞에 놓여있던 무수히 많은 갈림길(무수히 많은 영화들) 앞에는 저마다의 호객꾼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주저앉은 곳은 호객꾼들의 영토였던 것이다. 그들은 수려한 외모와 상냥한 표정, 그리고 화려한 언술과 과장된 어조로 행인들의 주머니를 노렸다. 옛날에는 말이 화려한 사람, 말만 앞세우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경고가 설득력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모두가 장사치가 되어 호객꾼의 언술을 배우기 위해 혈안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영업 또는 낚시 sale or fishing of all against all'가 횡횡하는 세상에서 나 역시 그 '만인' 중의 한 명이 되어 호객꾼의 말을 학습하고 있었는데, 학습 중에 길을 잃은 나는 일종의 지진아였던 셈이다.

 

그때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책의 표지 중앙에는 이상한 의문문이 있었다.

 

"영화는 예술인가?"

 

이것은 너무나 쉬운 질문 아닌가. 오늘날의 관객이라면 누구나 영화는 예술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우문처럼 들리기도 했다. 너무나 자명한 물음이라 호전성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책은 하나마나한 말을 하거나 아니면 공격적인 말을 하거나 하는 그런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표지 오른쪽 상단에 있는 작은 글씨로 새겨진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을 향한 시선"


(그림출처: 출판사 홈페이지 http://ssbooks.biz/?p=261)


 

위 문장에서 "영화" "시선"은 알겠는데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을 향한"은 그 의미가 아리송했다. 다정한 무관심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러한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더욱이 이 문장을 책의 제목 "영화는 예술인가"와 나란히 놓고 보니 두 문장 사이에서 묘한 균열 또는 거리감이 드러났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영화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과 단어의 낯선 조합이 만들어내는 틈새가 넓어졌고 나는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마치 책의 표지가 미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초대장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영화는 무척 익숙한 그런 것인데... 영화관련 책이라면 이런 저런 것들을 꽤나 읽었는데... 영화가 무엇인지 알려주려고 하는 책들, 영화를 규정하려고 하는 책들, 영화를 분석하려는 책들은 많았는데.... 영화를 낯설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책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은 처음부터 낯선 기분을 준다.

 

 

2.

책은 뜻밖에도 별빛으로 시작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론강의 별밤>이 독자를 반긴다. 빈센트의 그림에는 "빈센트는 대낮 하늘보다 더욱 색감이 풍부한 밤하늘을 그리고 싶어했다"는 설명이 있다. 그리고 저자 역시 어둠 속에서 풍부한 색감을 꿈꾸었던 고흐의 간절함이 담긴 영화를 꿈꾸고 있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프롤로그의 첫 페이지.


 

 "특히 어둠의 방에서 만나는 스크린―블록버스터가 아니라 희미한 기억 사이로 좀더 선명한 기억들을 떠올려주는 <파이란> <블레이드 러너같은 작품 말이다―은 다른 어느 예술 장르보다 생생하게 잃어버린 기억의 잔상들을 재구성하여 현재 속의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봉인된 기억을 다시 열어 보이며친밀감 어리면서도 낯선 추억의 공간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영화는 추억에 대한 추억인 것이다." (11~12쪽, 굵은 글씨는 글쓴이의 강조)


별빛과도 같은 영화를 그리워하며 영화는 추억에 대한 추억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에는 시정이 가득하다. 그러한 목소리로 저자는 "보편성을 지닌 예술 작품들은 다양한 인간이 이루는 공동체의 꿈에 관한 의지적 기억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영화 역시 그러기를 희망한다.

 

저자는 "무엇인가를 보고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것, 그리하여 너와 나의 추억을 되돌아보고 서로의 아픔을 함께하며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서로의 연민을 나누는 것, 아름다운 시간을 꿈꾸게 하는 것, 그 꿈으로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것, 바로 이것이 영화의 길"(18쪽)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영화의 길을 친구와, 독자와, 관객과 함께 걷고 싶어한다. 오늘날의 영화가 그러한 영화의 길을 관객들 앞에 제시해주었으면 하고 희망한다. 그러나 저자의 눈에 비친 영화계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저자는 아픈 현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지적한다.

 

"하지만 권력지향적인 비영화적 인물들의 영화 활동에 의한 부작용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재계정계학계 모두 영화의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다재계는 묻지마식 상업성 투자로정계는 권위 홍보물로학계는 품위 유지 보조 수단으로 영화의 공간을 오염시킨다그만큼 영화의 공간은 표현의 자유와 참신성이라는 미명하에 배설물 수준의 상품으로 오염되어 자율성을 상실해가고어느덧 아무런 반감 없이 할리우드식 한국영화가 빚어내는 억지 주입식 블록버스터들에 자연스럽게 적응해버리고 말았다영화는 이제 비즈니스로서홍보 대용으로서지식과 품위의 척도로서의 그 부차적인 성격들에 짓눌려 꿈의 산물이라는 자신의 원초적 성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상품 시장으로서 기능을 겨냥한 해외 영화제 수상을 겨냥하여 투자한 영화의 수상은 물론 영예로운 일이나 그 수상을 자화자찬하며 한국영화의 품위 운운하는 사이비 영화인들의 관객모독이 절정에 이른 것이다." (40쪽, 굵은 글씨는 글쓴이의 강조.)

 

저자는 영화 외적인 것으로 영화를 평가하고 관객을 모독하는 현실이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빛의 추구에 있어 우리가 종래 가져왔던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아마도 영화에 있어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부분 역시 바로 이 점일 것이다. 어둠을 찾아 나서지 아니하고 빛을 찾아 나서는 것은, 흙 속에 묻힌 뿌리는 보지 않고 아름다운 꽃망울만 보려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망울의 전제 조건은 뿌리이듯이, 어둠은 곧 빛의 전제조건이다". (59쪽, 굵은 글씨는 글쓴이의 강조)


나는 여기까지 읽었을 때, 저자가 던진 영화가 예술인가라는 질문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저자의 뜻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사랑이 깊을 때, 그리고 밤이 깊을 때 찾아오는 것 아닌가!) 이 책에는 영화다운 영화를 규정하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어떠한 영화가 영화다운 영화인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가득하다. 영화는 예술인가로 시작된 질문은, 영화는 종합예술인가, 영화는 빛의 예술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일종의 통념으로 자리잡은 영화에 대한 편견에 이의를 제기하며, 영화가 시작되었던 순간, 즉 뤼미에르 형제에 의하여 '시네마토그라프cinématographe'가 만들어진 순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라프가 촬영한 필름이 처음으로 상영되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시작되어 백 년이 조금 넘은 영화사를 밤하늘을 올려보듯 바라보며, 영화사 속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작품들을 하나씩 반추해 가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보인다. 때로는 시적인 목소리로, 때로는 담담한 목소리로, 때로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3.


용기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것은 이론이나 지식보다도 용기였다.

 

요즘의 나는 삶이라는 저잣거리에서 지쳐 있었다. 지쳐서 정신이 없었다. 마음은 언제나 부산했지만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비즈니스계의 말을 학습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노력만 할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급해졌고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기 보다는 손해 보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시선을 이곳저곳으로 돌렸다.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이면 나의 눈길을 받아주는 것이면 어디에나 시선을 던졌다. 부지런을 떨었지만 너무 많이 보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기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럴 때 이 책을 읽었고, 이 책을 읽으면서 길을 찾지 못해 주저하고 있을 때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을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밤하늘에 낀 먹구름이 별을 감추고 있다 하여도 구름 너머에 반짝이는 빛이 있다는 믿음을 얻었다. 시와 음악과 영화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에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학생 시절 이후에 읽지 않았던 타르코프스키의 글을 다시 읽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타르코프스키와 브레송 같은 영화감독도 있으며 빈센트와 같은 화가도 있으며, 생텍쥐페리 같은 작가, 윤동주 같은 시인, 김광석 같은 가수, 김영갑 같은 사진가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우리의 밤하늘을, 그리고 사람들의 땅 위를 수놓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나의 밤하늘에도 이토록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고 그 깨달음에서 용기와 위로와 희망을 얻었다.





◆ 서명: <영화는 예술인가>

    저자: 송태효

    출판사: 새로운 사람들

    가격 등 자세한 책 정보는 알라딘 링크 참조.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1204853


◆ 위의 리뷰에서는 저자가 영화를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을 향한 시선"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다. 다정한 무관심을 향한 시선 또는 다정한 무관심을 지닌 시선이 어떤 것인지는 책을 통해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이 책이 마음에 드는 점 중에 하나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영화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점이다. 이 책에는 브레송의 <소매치기>와 같은 고전작품도 있고,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과 같은 거장의 작품도 있으며, <양들의 침묵>과 같은 스릴러, <원스>와 같은 음악영화, <워낭소리>와 같은 다큐멘터리, <파이란>같은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와 같은 일본 영화, <노인과 바다>같은 애니매이션도 있다. 대개의 영화 서적들이 장르, 국적, 작품의 감독(거장인가 아닌가), 만들어진 시기(옛 영화인가 요즘의 영화인가), 제작 규모(블록버스터인가 독립영화인가) 등의 기준으로 영화를 선별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독특한 구성이다. 이것은 저자가 영화를 기존의 틀로 재단하지 않는 자세, 오직 영화를 영화로 대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 같다.


◆ 분석하거나 해부하는 시선으로 영화를 보는 관점과는 차별화된 영화에 대한 관점이 그리운 사람, 화려하고 자극적인 영상들로 인해 두통을 겪은 적이 있는 사람, 영화가 삶의 일부인 사람, 그리고 영화 또는 예술 작품에서 위로를 받았던 추억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책의 뒷면



영화는 예술인가 - 10점
송태효 지음/새로운사람들